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 (문단 편집) === 1932~1933: 절체절명의 위기 === 1932년 7월의 유례없는 대승으로 37%를 득표한 나치당이었지만 정권 장악에는 실패하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 우익은 히틀러와 철천지 원수가 된 상태였으므로 연정은 꿈도 못꾸었고 히틀러 본인도 줄곧 단독집권을 고집하였으나,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저 득표 수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론 이룩한 수치 자체는 대단하다. 바이마르 체제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이 불참한 1919년 첫 총선 이후 30%를 넘은 적이 없다. 25%도 두번이고 다른 선거에선 20% 초반이었다.즉 1919년 총선 이후 독일 정당 중 최대 득표율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과반수를 넘으려면 14%를 더 채워야 했고, 반복하지만 히틀러 본인부터가 계속 단독집권에 집착하였으므로 크게 의미가 없었다. 히틀러의 집착은 나치당의 상승세가 매우 가팔랐던 것도 한몫한다. 불과 2년만에 의석 수를 두배로 불려냈으니 다음 선거면 단독집권도 꿈도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했는지, 공산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에 나치당이 동의해버리고 총선을 밀어붙여 11월에 또 한번 선거를 치뤘다. '''문제는 나치당이 이미 끝물을 타고 있었단 점이다.''' 1932년 11월의 선거는 나치당의 대패로 끝났다. 물론 33%의 득표율로 여전히 높은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야망으로 더 이상의 집권 희망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유권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원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유명 인사이기는 했지만 결국 나치당은 근본적으로 군소 정당이었다. 2%의 득표율을 37%로 불리고 300만 [[SA|돌격대]]를 키우느라 나치당은 단기간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으며, 특히 3년간 선거를 대선 총선 도합 4번이나 치르면서 빚이 잔뜩 늘어난 상황이었는데,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집권을 하지 못하니 후원이 끊어지고, 후원이 끊어지니 선거에 돈을 쓰지 못하고 득표가 주는 악순환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디까지 추락할지 아무도 몰랐던 독일 경기가 1932년 봄에 바닥을 치고 점차 회복세에 있었다. 11월 총선 당시 실질적인 집권당이었던 보수 우파 독일국가인민당은 이 덕을 톡톡히 보아 공산당과 함께 해당 선거에서 유이하게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히틀러로 똘똘 뭉쳤던 나치당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레고어 슈트라서 일파는 더이상 히틀러에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고 선거 후 집권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총리와 결탁을 시도하기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